The Pachinko Parlour - 일본 속 재일조선인 여성의 정체성 탐구 (Elisa Shua Dusapin)
경계 위에 선 사람들, 그들이 만들어낸 조용한 울림
Elisa Shua Dusapin의 『The Pachinko Parlour』는 정체성의 경계에 서 있는 한 젊은 여성의 내면을 따라가는, 고요하지만 날카로운 서사이다. 프랑스-한국계 작가인 두사팽은 이 소설에서 도쿄를 배경으로 재일조선인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가진 인물들을 통해 정체성, 언어, 뿌리에 대한 고민을 섬세하게 풀어낸다.
이 작품은 단순한 여행기나 가족 방문기가 아니다. 언어 장벽과 문화적 소외, 역사적 맥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고립감, 불편함, 그리고 희미하지만 끈질긴 유대감을 탐구한다. 『Winter in Sokcho』로 독자적인 문체와 주제를 선보인 저자는 이번 작품에서도 특유의 미니멀리즘적 서술과 감각적인 묘사로 독자의 감각을 천천히 자극한다.
줄거리 요약: 일본이라는 타지에서 만난 타자성
주인공은 프랑스에서 거주 중인 젊은 여성 클레어다. 그녀는 여름을 맞아 도쿄에 거주하는 할머니를 돌보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게 된다. 클레어는 재일조선인인 할머니의 과거와 그녀가 운영하던 파친코 가게의 흔적을 따라가며,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묻기 시작한다.
도쿄는 그녀에게 낯설면서도 익숙한 공간이다. 피상적으로는 일본 문화에 익숙하지만, 실제로 그곳에 속해본 적은 없다. 한국계 프랑스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도 일본에서는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그녀는 언어적 단절 속에서도 조심스럽게 주변 인물들과 관계를 맺으며, 서서히 자신과 가족의 과거, 그리고 현재를 이해해나간다.
파친코라는 공간의 상징성
소설의 중심 공간인 파친코 가게는 단순한 오락장이 아니다. 그것은 재일조선인 커뮤니티의 자립 수단이었으며, 동시에 일본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이 만들어낸 독립적인 공간이었다. 클레어의 할머니가 이 가게를 운영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일본 사회 내에서 감내해야 했던 차별과 생존 전략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파친코는 반복적이고 폐쇄적인 구조를 가진 게임이다. 이는 재일조선인의 정체성, 반복되는 차별의 역사, 그리고 사회 안에서 느끼는 갇힘과도 연결된다. 클레어가 이 공간을 다시 들여다보는 과정은 단순한 기억의 회복이 아니라, 침묵 속에 묻힌 감정과 역사를 꺼내는 행위로 읽힌다.
언어와 소통의 단절 속 연결의 시도
작품 전반에 걸쳐 클레어는 언어의 경계에 갇혀 있다. 일본어는 서툴고, 한국어는 더더욱 낯설다. 그녀는 할머니와 충분히 소통하지 못하고, 통역을 끼고서야 겨우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이해한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감정과 기억은 소설의 중요한 흐름이다.
저자는 언어가 아니라 ‘공간’과 ‘행위’를 통해 감정을 전달한다. 함께 나누는 식사, 무심한 손길, 같이 걷는 침묵의 거리에서 독자는 인물 간의 정서적 교류를 감지하게 된다. 이는 말보다 더 강렬한 유대의 방식으로,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미니멀리즘적 문체의 힘
두사팽의 문체는 간결하지만 감각적이다. 설명을 절제하고 여백을 두는 방식은 독자에게 해석의 자유를 허용하면서도, 불편한 감정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감정이 폭발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강하게 느껴지는 고립감, 서늘한 분위기, 그리고 그 속의 따뜻함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풍경의 묘사 또한 매우 탁월하다. 한여름 도쿄의 찜통 같은 더위, 바깥세상의 소음, 파친코 기계 소리, 에어컨의 윙윙거림 같은 일상적 사운드들이 현실감을 더하며, 독자는 마치 그 공간에 함께 있는 듯한 생생함을 느낄 수 있다.
정체성과 역사, 그리고 여성의 시선
『The Pachinko Parlour』는 단순히 정체성 탐구를 넘어, 여성의 삶에 대한 질문도 함께 던진다. 할머니 세대는 조용히 감내하며 삶을 유지해온 세대라면, 클레어는 질문하고, 추적하고, 연결하려는 세대다. 여성이라는 공통된 정체성 안에서 그들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왔지만, 상처를 공유하고 있다.
또한 이 소설은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가 단지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의 정체성과 문화로서 존중받아야 함을 시사한다. 클레어는 자신이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니며 프랑스인도 아닌’ 어딘가의 존재임을 자각하면서, 바로 그 모호함 속에서 자아를 발견해간다.
읽고 난 뒤의 여운과 사유
이 소설은 결코 극적인 사건이나 반전을 통해 독자를 사로잡지 않는다. 대신 조용하고 세밀한 묘사를 통해 내면을 뒤흔든다. 클레어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뿌리, 가정, 가족의 침묵, 언어적 한계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The Pachinko Parlour』는 '소속되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바로 그 이야기가 오늘날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다.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경계인들, 이방인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관계들… 이 작품은 그들의 삶을 아름답고도 조용하게 응시한다.
결론
『The Pachinko Parlour』는 단순한 가족 방문기나 다문화 정체성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정체성, 역사, 언어, 소속에 대한 깊은 사유를 유도하는 문학 작품이다. 독자는 클레어의 고요한 여정을 따라가며, 말로 다 하지 못한 감정과 기억의 힘을 체험하게 된다.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말보다 강한 침묵의 연대, 그리고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과 유대를 느껴보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