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mon - 미해결 사건과 내면의 균열을 따라가는 심리 스릴러 (Kwon Yeo-sun)
진실보다 깊은 고통,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Lemon』은 권여선(Kwon Yeo-sun) 작가가 선보인 강렬한 심리 스릴러이자 문학적인 미스터리다. 한 고등학생의 미해결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피해자의 주변 인물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보며 교차되는 구조를 가진 이 소설은, 단순한 ‘누가 범인인가’의 문제를 넘어 인간 내면의 균열, 사회 구조 속 불평등, 그리고 애도의 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2019년 《자음과모음》에 발표된 후 2021년 영어로 번역 출간되어 뉴욕 타임스에 소개되며 해외 독자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 작품은, 단 한 권의 짧은 분량 안에 압축적인 문체와 잊히지 않는 여운을 담아냈다.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이 작품은, 독자에게 사건의 결말보다는 그 주변을 끊임없이 응시하게 만든다.
이야기의 시작: ‘그 여름, 혜연이 죽었다’
2002년 어느 여름, 미모로 유명했던 고등학생 김혜연이 공원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사건은 곧 ‘레몬 사건’으로 불리며 언론의 관심을 받았고, 용의자는 두 명으로 좁혀진다. 부유하고 잘생긴 남학생 한만수, 그리고 가난하지만 성실했던 남학생 신정준. 하지만 사건은 결국 해결되지 않고, 수사는 흐지부지 종료된다. 이후 이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잊혀지게 된다.
그러나 소설은 이 사건을 잊지 못한 세 명의 여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피해자 김혜연의 동생 김다언, 사건 당시 혜연의 친구였던 윤사영, 그리고 한때 용의자와 얽혔던 교차 인물들. 이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혜연의 죽음을 되짚으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각기 다른 시점, 기억, 감정의 조각들을 접하게 되고, 사건의 실체보다는 ‘사건이 남긴 상흔’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다층적 시점 구조와 기억의 왜곡
『Lemon』의 가장 큰 서사적 특징은 다층적인 시점 구성이다. 1인칭 화자가 반복적으로 바뀌며, 각각의 인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진실을 명확히 밝히는 대신,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을 제시한다. 이들은 모두 ‘정확히 본 것’은 없지만, 자신만의 시선으로 혜연의 죽음을 기억한다.
예를 들어, 동생 김다언은 언니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범인을 찾으려는 강박에 시달리며 오랜 시간 집착한다. 그녀는 혜연이 살았던 방식, 친구들과의 관계, 죽음 이후의 세상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마침내 어떤 방식으로든 ‘정의’를 이루고자 한다. 반면 혜연의 친구 윤사영은 사건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으면서도, 사건을 둘러싼 감정의 폭력성에 오래도록 영향을 받는다.
이와 같이 각자의 기억은 명확한 ‘사실’을 제공하지 않으며, 오히려 독자는 인물들의 모호하고 흔들리는 시선을 통해, 한 사건이 남긴 정서적 파문과 왜곡의 과정을 목격하게 된다.
미해결 범죄, 그리고 여성의 시선
『Lemon』은 여성의 시선으로 구성된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미해결 범죄라는 장르적 설정 위에서, 이 소설은 여성 인물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감정의 작동 방식, 그리고 사회가 그들에게 부여한 역할을 끊임없이 해체한다. 이들은 범인을 쫓는 수사관이 아니다. 사건의 ‘피해자’이자 ‘목격자’이며 동시에 ‘생존자’다.
한 명의 여성(혜연)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또 다른 여성(다언, 사영)은 각각의 방식으로 이 죽음을 해석하고 반응한다. 그들의 삶은 죽음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지만, 그 속에는 지워지지 않는 균열이 자리하고 있다. 이 소설은 여성의 시선으로 구성된 애도의 서사이자, 폭력 이후의 삶을 그리는 이야기로도 읽힌다.
‘레몬’이라는 상징: 아름다움과 부패 사이의 경계
제목에 사용된 ‘레몬’은 단순한 과일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레몬’은 혜연이 죽던 날 입고 있던 노란 원피스의 색깔이며, 동시에 그녀의 아름다움과 덧없음을 상징하는 기호다. 소설 내내 반복되는 ‘노란색’의 이미지는 아름다움이 어떻게 시선의 대상이 되고, 소비되고, 결국 파괴되는지를 보여주는 은유적 장치다.
혜연은 “너무 예뻤다”는 이유로 언제나 주목을 받았지만, 그 외의 인격이나 삶은 거의 조명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녀의 미모를 이야기하고, 죽음 이후에도 그것만을 기억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하는 외모 중심의 시선, 그리고 그것이 낳는 폭력의 구조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문체의 힘: 단단한 문장, 잔인한 여운
권여선의 문장은 간결하고 절제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깊은 감정의 파동이 숨겨져 있다. 인물들은 많은 것을 말하지 않으며, 종종 감정을 억누르고 침묵한다. 그러나 그 침묵이야말로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날카로운 단검처럼 독자의 감정선을 건드리며,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특히 김다언의 내면 독백은 집요하고 무거우며, 독자는 그녀의 불안, 분노, 상실, 그리고 애도되지 못한 감정들과 함께 거리를 걷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떤 면에서 『Lemon』은 ‘말하지 못한 것들’이 더 많은 소설이며, 그 공백이야말로 이 작품이 던지는 가장 날카로운 메시지다.
해결되지 않은 끝, 그리고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
이 소설은 범인의 정체를 끝내 확정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일부 독자는 결말에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의도적으로 이 미해결 상태를 유지한다. 사건의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이 남긴 감정, 그것이 주변 인물들의 삶을 어떻게 휘저었는가 하는 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사건의 해결’을 통해 정의를 완성하려 한다. 그러나 『Lemon』은 정의의 불완전함, 진실의 왜곡 가능성, 그리고 상처의 지속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독자는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후에도 계속해서 생각하게 된다. 과연 진실이란 무엇인가? 범인을 알아낸다고 이 고통은 끝나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결론
『Lemon』은 미스터리의 외형을 갖춘 심리 소설이자, 한국 사회의 폭력과 젠더 문제, 계층의 문제까지 함께 내포한 깊이 있는 문학이다. 짧은 분량 안에 담긴 이 강렬한 서사는 독자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머무르며, 단순한 사건 중심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사건 이후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한다.
권여선은 이 작품을 통해 ‘말해지지 못한 이야기’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며, 독자가 상처를 응시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다. 진실을 알지 못하더라도, 상처를 마주하는 용기만큼은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임을 조용히 일깨운다.
『Lemon』은 지금 이 사회에서, 누구나 한 번쯤 읽고 곱씹어야 할 이야기다. 침묵을 걷고, 감정을 바라보며,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